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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칼럼] `超一流의 産室` 바이킹 국가 연구(下)

no1tv 2011. 1. 4. 20:25


'超一流의 産室' 바이킹 국가 연구(下)

尙武정신과 해양정신이 改新敎와 결합되다


글 :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 구스타프 아돌프의 스웨덴군, 30년 전쟁에 참전해 신교도 수호
⊙ 노르웨이, 北海 석유수입으로 세계 2위의 國富기금(4550억 달러) 확보, 1인당 보유 자산 세계 1위
⊙ 獨ㆍ蘇 사이에서 국가 이끌며 독립 지켜낸 핀란드의 만네르헤임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이 건조한 전함 바사호.


정치적 학살은 주로 반대세력에 겁을 주기 위하여 이뤄지지만 오히려 반발을 불러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엔 거대한 왕궁(王宮)이 평온한 바다를 내려다본다.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왕궁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단조롭고 육중하게 보이는 왕궁의 방이 600개가 넘는다. 이 왕궁 정문 앞은 ‘스톡홀름의 피바다’(Stockholm Bloodbath)라고 불리는 사건이 난 곳인데 기념물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스웨덴이란 나라의 탄생지이다. 국가가 피바다 한가운데서 태어난 경우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덴마크를 중심으로 연방국가를 만들어 살아왔다. 덴마크 왕가(王家)가 지배자였다. 16세기 초 스웨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귀족들이 중심이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두 차례 진압군을 보냈으나 스웨덴 반군(反軍)에 밀렸다. 세 번째 진압군은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용병(傭兵)들을 포함한 대군(大軍)이었다. 스텐 스투레가 지휘하는 스웨덴 반군은 연패(連敗)하였다. 스투레도 부상당한 뒤 죽었다.

스웨덴의 귀족회의는 덴마크 왕이 반란 책임자들에 대한 사면(赦免)을 약속하면 다시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스투레의 부인의 지휘하에 그 뒤에도 스톡홀름에서 항전(抗戰)을 계속하였다. 덴마크의 해군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에서 공격해 들어오자 스웨덴 반군은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1520년 9월 7일이었다.

11월 1일 스웨덴의 대표자들은 크리스티안 2세에 충성을 다짐하였다. 덴마크 왕이 스웨덴 왕위(王位)를 세습하는 데도 동의하였다.

11월 4일 크리스티안 왕은 트롤레 대주교가 집전(執典)한 스웨덴 왕위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 축하 행사도 사흘간 벌어졌다. 7일 크리스티안 왕은 스웨덴의 지도자들을 궁정의 저녁 회의에 초청하였다. 다음 날 저녁, 덴마크 군인들이 난입(亂入), 스웨덴 지도자들을 끌고나가 감금하였다. 9일 트롤레 대주교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지도자들에게 사형(死刑)을 선고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 지도자들은 수년 전 덴마크 왕가 편인 트롤레 대주교를 쫓아내려는 모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음모자 명단을 가지고 보복에 나선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반군을 지원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바깥으로 끌려나가 참수(斬首)되거나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이틀간 82명의 스웨덴 지도자들이 처형당했다. 크리스티안 왕은 반군 지도자 스투레와 그의 어린 아들 무덤까지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 불태우게 했다.

이때 처형된 에릭 요한슨의 아들 구스타프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는 스웨덴의 북쪽 달라르나 지방으로 피신,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반란군을 조직, 독립전쟁을 일으켜 덴마크 군대를 쳐부순다.


115년 사이 여섯 번 싸운 덴마크-스웨덴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년 6월 24일 스톡홀름에 입성(入城)했다. 그 보름 전인 6월 6일 그는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再)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國敎)로 택한다. 1525년엔 신약(新約)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거의 동시에 가톨릭을 버렸다.

덴마크는 1523년에 스웨덴의 독립을 허용한 뒤에도 실지(失地)를 회복, 스웨덴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1563~1679년의 115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전쟁을 하였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스웨덴은 반격에 나서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와 코펜하겐을 2년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덴마크는 결국 북구(北歐)의 패자(覇者) 자리를 스웨덴에 넘겨주고 만다.

스웨덴 수도(首都) 스톡홀름에 아주 인기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VASAMUSEET)이다. 1628년 8월 10일의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戰艦) ‘바사’를 1961년에 건져 복원,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구경하러 온다. 낙후되었던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强國)으로 만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대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전함은 상부가 너무 무거워 풍랑이 불자 뒤집히면서 침몰하였다. 전함은 길이가 69m, 높이가 49m이다. 배수량(排水量) 1200t에 64개의 대포를 실었고, 탑승 선원은 400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약 50명이 구조되었다. 침몰한 곳이 해안에 가깝고 얕은 바다 밑이어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1만4000개의 조각을 맞추어 복원한 전함이므로 원래의 재질(材質)에 원래의 모습이다. 전복 사고 후 구스타프 대왕은 관련자를 문책하도록 지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과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설계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였다. 사고원인은 ‘신(神)의 뜻’으로 귀착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신교도를 지켜내다
‘현대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은 전쟁의 천재(天才)였다. 나폴레옹과 클라우제비츠가 숭배한 장군-왕이었다. 구스타프는 기병, 보병, 포병, 보급부대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기동전을 펼쳤다. 기병과 보병도 대포를 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병과(兵科)가 달라도 서로 도왔다. 전사학자(戰史學者)들은, 그를 ‘현대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대왕은 열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영명(英明)한 인물이었다.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그 사신의 나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틴어로 말하고 쓸 줄 알았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1618년 독일을 무대로 한 30년 전쟁 때 그는 신교도(新敎徒) 편에서 참전하였다. 그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구교(舊敎) 편인 합스부르크 왕조(신성로마제국)와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해 갔다. 한때 뮌헨이 있는 바이에른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 군은 당시 유럽 최강이었다. 잘 훈련된 스웨덴 보병의 사격은 명중률이 높았고 발사 시간이 빨랐다. 구스타프 대왕은 1632년 11월 6일 독일에서 전투 중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죽어도 스웨덴군(軍)은 승리하였다. 스웨덴 왕 가운데 ‘대왕’ 칭호는 그가 지금까지 유일하다. 죽었을 때 나이 38세, 재위(在位)는 21년이었다. 스웨덴은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유럽에서 러시아, 스페인 다음으로 면적이 큰 강국이 되었다.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가 되었다. 전함 바사호 앞에 서면 스웨덴 전성기의 영웅적인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스웨덴 군대가 신교도 편을 들지 않았으면 30년 종교전쟁은 구교도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거의 패배한 신교도 세력을 구한 것이 스웨덴이었다. 한때 스웨덴 군대는 독일의 반을 점령하였다. 30년 종교전쟁에서 그들은 독일에서 1500개의 도시, 1만8000개의 마을, 2000개의 성(城)을 파괴하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에선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王을 수입한 노르웨이와 스웨덴
프랑스군(軍) 원수(元帥) 출신으로 스웨덴 왕위에 오른 칼 요한 14세.

노르웨이는 138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와 연합국을 이뤘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가 패전국(敗戰國)이 되는 바람에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통치하였으나 큰 압박은 없었고 자치(自治)를 허용하였다.

노르웨이는 1905년 평화적으로 스웨덴과 분리, 독립한다. 이때 국민투표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을 선택하였다. 노르웨이는 오래전에 왕가의 맥이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왕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칼을 모셔 와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바이킹 시절의 노르웨이 왕 이름인 하콘 7세라 칭하고 아들 올라프를 왕세자(王世子)로 임명하였다. 지금 왕은 올라프의 아들인 하랄드 5세이다.

1810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있을 때 스웨덴 왕은 칼 13세였다. 왕세자가 죽어 후손이 끊어지자 귀족회의는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장군을 왕세자로 추대하였다.

베르나도트 장군은 나폴레옹이 신임하는 부하였다. 원수(元帥) 계급을 가졌던 그는 함부르크 일대를 통치하는 총독으로 근무 중 스웨덴의 왕세자로 영입되어 군의 참모총장도 겸했다. 스웨덴이 연합군 편에서 나폴레옹을 공격할 때는 이를 지휘하였다. 1818년 칼 13세가 죽자 베르나도트 장군이 스웨덴의 왕이 되어 칼 요한 14세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왕조(王朝)를 이어가고 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노르웨이를 이길 수 없는 中國
북해유전 덕분에 노르웨이는 세계 5위의 석유수출국이 됐다.

중국 정부는 최근 반(反)체제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2010년도 노벨평화상을 주기로 결정한 노르웨이에 압박을 시도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평화상 결정에 관한 전권(全權)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갖고 있는데,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위원은 후보자 선정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지구 상에서 중국의 압박이 가장 먹히지 않는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노르웨이는 싸움꾼 덴마크와 장사꾼 스웨덴 사이에 끼여 기(氣)를 제대로 펴보지 못한 순박한 동생격(格)이었다. 하늘이 이런 노르웨이에 축복을 내린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1969년 북해(北海)의 노르웨이 수역(水域) 안에서 거대한 유전(油田)이 발견된 것이다. 척박한 고향을 떠나 해적질을 하면서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나라, 본토(本土) 인구만 한 이민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나라가 축복 받은 땅으로 변한 것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출 세계 5위, 가스수출 세계 3위이다. 국내총생산의 약 20%가 석유수입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입금을 잘 관리한다. 석유수입을 국부기금(國富基金)화하였는데, 2009년 11월 현재 4550억 달러이다. 아부다비 기금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1조 달러에 달하고 결국은 세계 최대의 기금이 될 것이다.

노르웨이 사람은 머리 좋고 체력 좋은 사람이 부지런하고 마음도 좋은 경우이다. 석유수입이 이 정도이면 서비스업(業)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1, 2차 산업은 기피하게 되는데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노르웨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해산물(海産物) 수출국이고, 세계 6위의 상선대(商船隊)를 갖고 있다. 잘사는 민족이 가장 먼저 버리는 게 수산, 해운(海運)인데 노르웨이는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1000년 전의 바이킹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이들의 해양정신이다.

노르웨이는 깊은 계곡이 많아 전체 전력(電力)의 약 98%를 수력(水力)발전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석유를 많이 수출할 수 있는 것이다. 상장(上場)된 회사 주식의 약 30%를 국가가 보유한다. 석유, 통신, 은행, 알루미늄 산업은 국영(國營)이다.

의료비는 전액 무료이다. 출산(出産)휴가는 부모가 다 받는 데 1년이다. 이 정도이면 놀고먹자는 사람들이 많아 실업률이 높을 것 같지만 1~3%이다. 노르웨이는 1인당 GDP가 약 10만 달러로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 2위이지만 1인당 자산(資産) 보유액은 세계 1위이다. 쉽게 말하면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란 뜻이다. 작년 초엔 인구가 두 배인 스웨덴보다 GDP가 많았다.

1인당 GDP뿐 아니라 삶의 질, 평화지수, 자유지수, 국가운영 성적 등 거의 모든 국제통계에서 노르웨이는 최상위권이다. 작년 미국의 <폴린 폴리시>지(誌)가 매긴 ‘성공-실패국가 랭킹’에서 노르웨이는 성공국가 1등이었다.

이런 노르웨이가 아직 국민개병제(皆兵制)를 유지한다. 상비군은 2만3000명, 동원가능 예비군까지 합치면 8만3000명이다. 복무기간은 6~12개월이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국이기도 하다.

노르웨이는 물가가 비싸다. 미국보다 약 30% 높다. 임금은 직종(職種)이나 남녀 간 차이가 매우 작다. 청소부, 간호사, 정부 고위관리, 대학교수의 월급이 거의 같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인류역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선진국이 노르웨이인 셈이다.

이런 나라에 중국이 무슨 압력을 넣을 것인가? 세계에서 가장 인권(人權)을 존중하는 나라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인권을 무시하는 나라가 무슨 압력을 넣는단 말인가? 노르웨이를 괴롭힐수록 국제사회에선 중국이 못난 나라로 비칠 것이다. 중국으로선 지는 게임이다.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
송네 피오르.

필자는 2006년 여름 미국 알래스카에서 ‘트레이시의 팔’(Tracy’s Arm)이란 이름을 가진 피오르(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처럼 생긴 지형. 양쪽으로 절벽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를 구경하면서 감탄을 연발하다가 곁에 있는 동료 관광객에게 “노르웨이의 피오르와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한 수 위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장관(壯觀)이라면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5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유람선을 타고 송네 피오르를 구경하였다. 알래스카 피오르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송네 피오르는 북해에서 내륙(內陸)으로 205km나 들어간 강처럼 생긴 긴 만(灣)이다. 그린란드의 스코레스비 순드 피오르 다음으로 길다.

필자는 송네 피오르가 내륙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온 지점인 프램이란 작은 항구에서 유람선을 탔다. 수심이 깊어 8만t 이상 나가는 크루즈 선박도 접안(接岸)할 수 있는 마을이다. 송네 피오르의 가장 깊은 곳은 1308m이고 평균 폭은 4.5km, 가장 좁은 곳은 300m이다. 피오르 양쪽으로 솟은 산은 절벽을 이루는데 수면(水面)에서 1000m 이상 되는 직벽(直壁)도 많다. 이 직벽에 수많은 폭포가 걸려서 흘러내린다. 세계에서 낙차가 가장 큰 10대(大) 폭포 가운데 다섯 개는 노르웨이에 있다. 송네 피오르의 물색깔은 지구 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짙은 녹색이다.

사람 눈이 간사하다고 할까? 이 지구 상의 최고 자연경치 중 하나인데도 오래 보고 있으니 익숙해지면서 감동이 잦아들었다. 구도가 너무나 완벽하기에 싫증이 난 것인가.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처음 보는 이들은 “와!”하고 부르짖고는 말문을 닫는다고 한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고 장엄한 경치는 그 자체로서도 완결성을 갖기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프램에서 산악열차를 타면 20km를 달려 864m 산꼭대기에 오른다. 다른 보조시설이 없는 철도로서는 가장 경사가 급한 구간이다.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 대자연(大自然) 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안내자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이 작곡한 노래들을 틀어주었다. 노르웨이인(롤프 러브랜드/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남자)과 아일랜드인(피오눌라 세리/바이올리니스트. 여자) 두 사람으로 구성된 이 ‘시크릿 가든’은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특히 ‘저녁기도’(NOCTURNE)란 음악이 자연과 딱 들어맞았다. 눈 덮인 산(山), 명경 같은 강물, 숲,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을 버스 차창(車窓) 밖으로 음악과 함께 흘려보내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시크릿 가든’이 작곡한 음악과 노래는 유튜브(youtube.com)에 수십 곡이 올라 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와 친숙하다. 요사이 결혼식의 축가(祝歌)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두 곡은 ‘시크릿 가든’이 작곡하였다.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봄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이다. ‘봄을 위한 세레나데’는 한국에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번안(飜案)되었다. ‘봄 노래’가 ‘가을 노래’가 된 것이다. ‘시크릿 가든’의 노래를 들으면 노르웨이의 자연이 생각난다. 노르웨이인이 작곡자임으로 노르웨이적 감수성(자연과 인정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섬이 2만4000개 몰려 있는 스톡홀름 群島

북구를 여행하면 배를 많이 타게 된다. 지난해 5월 필자는 보름간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돌았는데 코펜하겐에서 오슬로,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는 여객선을 탔다. 유람선 비슷한 구조를 가진 여객선이라 즐길 것이 많았다. 이런 배를 타면 역시 바다 구경이다. 바다가 보이는 선실은 60유로 정도 더 줘야 한다. 여객선은 오후 늦게 출발, 다음 날 아침에 목적지에 닿는다.

스톡홀름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한 5만t 여객선은 스톡홀름 군도(群島)를 지난다. 남북 방향으로 약 2만4000개의 섬이 몰려 있는 곳이다. 정원 같은 섬, 등대만 있는 돌섬, 초등학교 운동장만 한 섬, 높이가 5m도 안되는 평평한 섬들 사이로 거선(巨船)이 지나는데, 수십m 거리를 두고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기도 한다. 섬의 종합전시장 같은 스톡홀름 군도 중 사람이 사는 데는 1000곳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 약 5만 개의 별장이 있다. 약간 과장이겠지만, 스톡홀름 사람들은 자가용 자동차만큼 요트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헬싱키의 名物 수오멘리나 요새
헬싱키의 명물 수오멘리나 요새의 포대.

스웨덴은 호수도 많다. 2에이크, 즉 8100평방미터 이상의 호수가 9만7500개이다. 핀란드는 500평방미터 이상을 호수라고 계산하는데 18만7888개이다. 여객선의 바에서 석양(夕陽)이 드는 자리를 잡고 스쳐 지나가는 바다와 섬과 갈매기의 비상(飛翔)을 구경하면서 머리를 텅 비우고 한 잔 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머문 세 번째 날 아침 호텔 프런트 근무자에게 “오늘 어디를 구경 가면 좋을지 추천해 줄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반문하였다.

“수오멘리나 요새를 가 보셨어요?”

안 가봤다고 하자 그는 “자신 있게 권합니다”라고 했다. 더구나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증수표이다.

헬싱키 항구에서 배를 타니 15분 만에 요새에 닿았다. 짧은 항해이지만 헬싱키를 바다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의 수도는 모두 항구이다.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이들 도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바다에서 바라본 헬싱키 시가지의 풍경 속에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루터교회와 러시아정교(正敎)교회 건물이 마주 보면서 양립(兩立)하고 있는 모습. 루터교회는 스웨덴의 영향, 정교교회는 러시아의 영향을 상징한다.

수오멘리나 요새는 1748년 핀란드가 스웨덴 속국(屬國)일 때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북쪽의 지브롤터란 별명을 얻었다. 두 섬에 걸쳐 있는 요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하루가 걸린다. 벙커, 포대, 잠수함, 박물관, 병영, 교회 등 볼 것도 많고 쉴 곳도 많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1808년 나폴레옹과 우호조약을 맺은 뒤 스웨덴을 공격, 이듬해 핀란드를 빼앗아간다. 이 스웨덴 요새는 그때 러시아 군대로부터 수개월간 포위된 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그 뒤 러시아는 터키를 상대로 한 크리미아 전쟁 때 프랑스와 영국을 적(敵)으로 돌린다. 1854년 8월 9일 영불(英佛) 연합함대는 이 요새를 향하여 2만1000발의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요새의 대포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였다. 영불군은 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1906년 7월 30일엔 요새 수비군이 러시아와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아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가 즉시 진압되었다. 78명의 반란군이 피살되고 처형되었다. 핀란드가 1917년 12월에 독립을 선언한 직후 벌어진 내전(內戰)이 끝나자 이 요새는 포로로 잡힌 공산주의자들을 수용하는 감옥 역할도 했다. 1만명에 육박하는 포로가 수용되었다. 그 가운데 10%는 수용 중 질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2차 대전 중엔 단 한 차례 러시아 공군의 폭격을 받았을 뿐이다.

요새 안에는 러시아군이 만든 정교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핀란드가 독립한 후엔 루터교회로 개조되었다. 언덕 위의 이 교회는 등대로도 쓰인다. 교회가 등대로 쓰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헬싱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스웨덴, 러시아, 핀란드의 역사를 느낄 수 있고, 평화로운 바다를 향해 있는 녹슨 대포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핀란드 독립을 도운 레닌

한국인들이 우리 국민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단어가 ‘한(恨)’과 ‘신바람’이듯이 핀란드 사람들은 ‘시수’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핀란드어(語)인데, ‘배짱’ 또는 ‘견디기’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핀란드의 역사를 반영한다.

핀란드는 극한(極限)의 자연환경과, 이웃한 두 강대국 스웨덴-러시아 사이에서 핍박과 설움을 견디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내고 드디어 세계 최고 국가를 만들어 냈다. 고생을 많이 한 핀란드 사람들은 과묵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사우나에 들어가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예사이다. 휴대전화의 메시지 기능은 말을 하기 싫어하는 핀란드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란 농담까지 있다.

수천 년간 한번도 독립하지 못하고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국으로만 있었던 핀란드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는 러시아 혁명의 주역(主役) 레닌이었다. 그는 제정(帝政)러시아 시절 혁명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유형(流刑)생활을 할 때 감방동료인 한 핀란드인의 도움을 받았다. 레닌은 핀란드로 탈출, 숨어 지내기도 하였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는 페테르그라드(나중에 레닌그라드로 개칭)와 핀란드를 오가면서 모의를 하였다. 러시아 공산혁명 이전부터 핀란드가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직후 핀란드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레닌은 러시아 신생 국가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독립 핀란드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하여 핀란드 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핀란드에선 친(親)러시아 공산세력과 친독일 민족세력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108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약 3만명이 죽었다. 만네르헤임 장군이 지휘하는 민족파의 백군(白軍)이 승리, 입헌(立憲)군주제를 선택하였으나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항복하자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핀란드 國父 만네르헤임 장군
핀란드의 국부(國父)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

핀란드의 건국(建國)과 세 차례 전쟁을 지도한 인물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이다. 그는 터키의 국부(國父)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를 닮은 드라마틱한 생애를 산 위인(偉人)이다. 그의 부계(父系)는 독일, 모계(母系)는 스웨덴인이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을 때 러시아군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다. 러일전쟁에도 참전, 봉천회전(奉天會戰)에서 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며 1차 대전 때는 러시아 기병부대를 지휘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났을 때는 기병군단장(중장)이었다.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노동자 세력은 사회주의를, 자본가와 농민과 상공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였다. 양쪽이 내전을 벌이자 만네르헤임은 백군을 지휘, 적군(赤軍)을 물리쳤다. 그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출범하는 과도기에 섭정(攝政)을 맡아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을 얻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일부에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후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19년부터 1939년 소련군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20년간 만네르헤임은 공직(公職)을 맡지 않았으나 국방력 건설에 자문을 해주고 핀란드가 내전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국론(國論)을 통합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탐험과 여행을 좋아했다.

1939년 11월 스탈린의 명령으로 소련군이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조국은 그를 다시 불렀다. 자신으로선 네 번째 참전이었다. 핀란드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의 60만 대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핀란드의 스키 부대는 게릴라 전법으로 대항하였고, 소련군 전차(戰車)에 ‘몰로토프 칵테일’이란 별명이 붙은 화염병(火焰甁)으로 저항하였다. 1940년 3월 소련과 핀란드는 모스크바 협정을 맺고 휴전하였다. 핀란드는 국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겼으나 국체(國體)를 보존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소련이 휴전 이후에도 추가적 요구를 하자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독소(獨蘇)전쟁이 일어났다. 개전(開戰) 전에 핀란드는 자국(自國) 내에 독일군이 들어와 대소(對蘇)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소련이 초전(初戰)에서 밀리자 핀란드는 실지를 회복하려고 독일 편에 서서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의 전쟁을 ‘겨울전쟁’, 1941년 전쟁을 ‘연장전’이라고 부른다.

만네르헤임은 이번에도 핀란드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을 존경하여 핀란드 주둔 8만 독일군의 지휘권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만네르헤임은 독일 편에서 싸웠지만 선을 그었다. 소련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데만 참전 목적을 두었다.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벌일 때도 핀란드군이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존경을 받다
1939년 소련과의 전쟁 당시 핀란드군은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소련군을 괴롭혔다.

1942년 6월 4일은 만네르헤임의 75세 생일이었다. 히틀러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비밀리에 핀란드를 방문하였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를 그의 사령부나 헬싱키에서 맞이하면 공식적인 성격의 회담으로 비칠까 신경을 써 지방 도시에서 만났다. 핀란드 측은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비밀녹음하였다. 히틀러는 만네르헤임에게 대소전(對蘇戰)에 더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44년이 되면서 소련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고,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 핀란드가 ‘지는 쪽’에 줄을 선 것이 확실해졌다. 만네르헤임과 핀란드 국가 지도부는 어떻게 하면 독일과 잡은 손을 떼고 소련과 휴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들은 만네르헤임만이 이 난국(難局)을 헤쳐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핀란드 지도부는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소련군이 핀란드를 공격하자 핀란드는 우선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독일군의 도움으로 국토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동맹조약에 서명하였던 대통령이 사임했다. 그를 이어받아 만네르헤임 장군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임(前任) 대통령이 서명한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휴전회담을 시작, 한 달 뒤 휴전이 성립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국토를 소련에 넘기고, 전쟁 배상을 하기로 하였으나 국체(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보존을 약속받았다. 소련 편에 서게 된 만네르헤임은 총부리를 돌려 한때의 동맹국이던 독일군을 핀란드에서 쫓아내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소련 등 연합국의 승리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만네르헤임은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였다. 연합국 중 아무도 만네르헤임을 전범(戰犯)으로 재판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을 맞아 “소련군이 핀란드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만네르헤임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만네르헤임은 히틀러와 스탈린으로부터 동시에 존경을 받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1946년 3월 4일 대통령직을 사임한 그는 1951년에 사망하였다. 84세였다.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전쟁배상을 기계류와 조선(造船) 등 물품을 통하여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계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핀란드는 냉전시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소련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 정부는 정치적인 인사(人事)에 대하여는 사전에 소련정부와 상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국익(國益)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또한 두 차례 전쟁을 통하여 핀란드인들의 투지와 자립(自立)정신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1989~1991년 소련 해체기에 핀란드는 재빨리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탈(脫)소련 정책을 선택하였다. 만네르헤임 기념관은 헬싱키 시내에 있다.


교육 1위 핀란드, 2위 한국

2010년 여름 <뉴스위크>지가 실시한 ‘최고 국가(Best Countries) 랭킹’에서 1등은 핀란드였다. 한국은 프랑스, 아일랜드, 싱가포르, 벨기에, 스페인보다 앞선 15위에 올랐다. 이 조사는 ‘어느 나라에 태어나는 게 성공을 보장하는가’라는 설문(設問)으로 이뤄졌다. 현재와 과거보다는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더 중시한 조사이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등수(等數)가 매우 높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국가가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모든 국민이 경쟁력 있는 교육을 받도록 엄격하게 관리한다. 〈뉴스위크〉는 사람과 국가의 성패(成敗)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교육이라면서 특히 취학(就學) 전 조기(早期)교육이 가장 성공적인 투자라고 강조하였다. 1960년대에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조기교육을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을 비교하는 조사를 시작하였다. 35년 뒤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조기교육을 받은 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갖고, 범죄와 이혼율도 낮았다.

조기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학생들은 18세까지 깨어 있는 시간의 반을 학교 바깥에서 보낸다고 한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게 좋다. 등교(登校)를 빨리 하고, 하교(下校)는 늦게 하고, 토요일에도 공부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과외수업이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이다.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투자도 효과적이다.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를 놓고 학생들의 배움 양(量)을 조사한 결과 3배의 차이가 났다고 한다. 부모의 수준도 자녀들의 학업과 출세를 좌우하는 큰 요인이다. 전문직 종사자를 부모로 둔 경우엔 3세 때 이미 다른 아이보다 어휘력(語彙力)과 지능지수에서 1년을 앞서간다.

‘최고 국가 조사’ 항목 중 교육부문에서 한국은 1위 핀란드에 이어 2위로 평가되었다. 〈뉴스위크〉의 평가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고, 한국 사정에 어두운 구석도 있겠지만(애국심 교육과 국어 교육의 실패를 간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한국 교육의 전체적인 모습은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그러니 교육망국론(亡國論)이란 말은 쓰지 않아야겠다.

헬싱키의 핀란드의 국립박물관에 가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글이 있었다.

<우리는 인종적으론 20%가 아시아 계통, 80%가 유럽계통이다. 문화적으론 유럽이다.>

핀란드인들은 바이킹족과 이웃하여 살다가 바이킹 문명(文明)의 일원이 되었다. 좋은 친구를 둔 덕분에 초일류(超一流)국가 클럽에 들어간 셈이다. 한국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덕분에 한미(韓美)동맹을 통하여 세계에서 가장 선진되고 강력하고 너그러운 나라와 친구가 되었다. 이 행운에 한국인의 교육열이 더해졌다. ‘삶의 질’ 랭킹 12위는 그렇게 하여 가능해진 것이다. ‘일류(一流) DNA’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교육이다.⊙



[조갑제닷컴 www.chogabje.com/ 2011.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