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일성 차이가 南北韓 차이로

유식한 이승만은 국가를 위해↔무식한 김일성은 자신을 위해

조갑제 대표

북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북한도 소위 건국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물론 남한과 북한은 서로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권력실체로서 인정하고 서로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건국 60주년이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60년 역사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12년,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을 통치해서 두 분을 합치면 30년 통치를 한 것으로 됩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두 사람이 60년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는 열 번째 인물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10명 바뀌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대를 이어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와 김일성-김정일이란 두 사람을 비교 해보면 왜 남한은 성공했고 북한은 실패했는지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두 사람을 비교하는 표를 만들면 대충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승만-박정희는 30년 통치를 했고 김일성-김정일은 60년 통치를 했습니다. 이승만-박정희는 해외에서 공부를 하고 산 경험이 있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은 해외여행을 잘 안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와 북한이라는 지역에서 한정된 생활을 오래 한 일종의 국내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은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승만은 한국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열심히 한문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 워싱턴대학, 그리고 하버드대학, 프리스턴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았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서 일본 육사, 그리고 해방 후에는 한국의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쳤습니다. 또 미국에서 연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의 경력을 보면 배운 경력이 굉장히 깁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배운 사람과 무식자의 차이입니다. 두 사람의 또 다른 차이는 이승만-박정희는 해외경험이 많고 배운 것이 많아 세계정세를 보는 눈이 뚜렷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개방정책을 썼습니다.

세계와 연계하며 일본과 수교를 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는 개방정책을 폈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지금까지 북한을 하나의 감옥으로 가두어 놓고 자기들끼리 무엇을 해보려는 폐쇄정책을 폈습니다. 개방하면 발전하고 폐쇄로 나가게 되면 반드시 실패한다는 것이 인류역사의 가장 확실한 교훈중의 하나입니다.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은 국민들을 위한 일을 했습니다. 국가를 위한 일을 했습니다. 부국강병정책을 썼습니다.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강력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이 이승만-박정희의 정책이었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자기를 위한 정책을 썼습니다. 그 측근들을 위한 정책을 썼습니다. 따라서 부국에는 실패하고 강병에는 성공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막대한 군사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나라는 망하고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 두 사람은 자주파입니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은 소련의 꼭두각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맞서서 미국과 싸우면서 미국을 설득해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이 써주는 꼭두각시 역할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1946년 무렵 스탈린한테 불려갔습니다. 스탈린이 두 사람한테 시험문제를 냈습니다. 각각 따로 방을 주면서 거기에 답안을 쓰라고 했습니다. 스탈린이 김일성이 써온 답안지와 박헌영이 써온 답안지를 비교해 보고 김일성을 권력자로 선택했습니다. 또한 북한의 헌법이라든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까지도 전부 다 북한 사람이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은 회의에서 스탈린이 결정해서 내려 준 것입니다.

즉 이승만-박정희는 자주파이고 김일성-김정일은 사대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박정희는 그러나 미국과 친했습니다. 일본과도 수교를 했습니다. 서방세계, 자본주의 국가, 잘 나가는 해양문화권의 나라들과 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김정일은 소련과 중국이라는 가장 낙후된 국가, 대륙 국가, 전체주의 국가,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고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는 국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즉 이승만-박정희는 좋은 나라와 친구가 되었고 김일성-김정일은 나쁜 나라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승만-박정희와 김일성-김정일의 또 다른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이승만-박정희는 경제를 먼저 발전시키고 그 다음에 군사력을 발전시키고 그 다음에 통일로 나간다는 정책을 썼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은 오로지 군사력만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선군정치라고 합니다. 선군정치는 군대가 우선이라는 뜻으로 국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국민생활이 세계 전체 수준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느냐는 사실을 말씀드린다면 죄송하지만 가장 가난한 축에 듭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약 300달러인데 그 중에서 100달러 정도는 군사비로 들어가는 것이니까 여러분들이 쓸 수 있는 돈은 연간 200달러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암시장 시세를 기준으로 하면 그 200달러가 100달러도 되고 50달러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도 이렇게 가난한 나라는 없습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금 2만 달러를 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은 100대 1의 지금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남한이 인구수가 북한의 두 배니까 사실은 남북한 전체의 국력차이는 200대 1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군사력을 제외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이렇게 전체 국력에서 밀리게 된 김정일은 핵 개발로 살 구멍을 찾고 있지만 그것은 살 구멍이 아니라 죽을 구멍으로 되고 있습니다.

다만 북한 동포 여러분이 김정일과 함께 낭떠러지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승만-박정희와 김일성-김정일의 더 결정적인 차이, 한 마디로 눈으로 보이는 차이는 무엇일가요? 남한에는 이승만-박정희의 동상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온통 김일성-김정일 동상과 기념물로 차 있습니다.

남한에는 나라를 발전시킨 지도자의 동상은 없지만 북한에는 나라를 망친 지도자의 동상이 수만 개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남한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1인 수령 지배체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아주 희비극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지금 건국 60주년을 맞는 마당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생존에 동상을 몇 군데 세웠습니다.

남산공원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으로 학생들이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킨 다음에 그 동상을 끌어내리고 부숴 버렸습니다. 전국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이 붙고(그분의 호가 우남인데) 우남이란 이름이 붙은 공원과 거리의 이름들도 다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대로 보게 되었으니까 건국 60주년을 맞으며 반드시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 토막 들려드리겠습니다. 1954년 7월인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갔습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서 미국에 가서 의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정부가 취하고 있는 아주 어정쩡한 對공산권 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아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1954년 7월30일에 백악관에서 두 번째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백악관 바로 옆에 있는 영빈관에 묵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 국무성에서 정상회담 후에 발표할 공동성명서의 초안을 들고 왔습니다. 그 초안에 이승만 대통령이 굉장히 싫어하는 문장이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한국은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호적으로 나간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미국은 그때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해서 동아시아에서 미군들이 작전을 좀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려고 이승만 정부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 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아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일본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싫고 한국이 일본에 비해서 아직도 국력이 약하기 때문에 국력을 키워서 수교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동성명서 초안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하기를 “이 친구들이 나를 불러놓고 올가미를 씌우려고 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며 회담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회담시간은 10시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백악관에서 왜 안 오느냐고 독촉전화가 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가서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회담은 열어야 됩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서야 이승만 대통령이 내키지 않았지만 백악관에 갔습니다.

10분 늦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하고 마주 앉자마자 한국과 일본의 국교 수립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안 그래도 화가 나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살아 있는 한 일본하고는 절대 상종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해 버렸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별명이 아이크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웃음을 잘 웃는 사람입니다. 유순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화가 나 방을 나가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의 등을 바라보면서 한국말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 물론 이 말은 통역되지 않았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가까스로 화를 식히고 회담장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외신기자 클럽에서 연설하기로 되어있는데 준비를 해야 하니까 먼저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난감한 것은 참모들이었습니다. 당시 주미대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을 해가지고 우리끼리라도 회담을 하자고 제안해 회담은 계속 되었고 여기서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합의 내용은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군사 원조 4억2000만 달러와 경제원조 2억8000만 달러 등 도합 7억 달러의 원조를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는 79세였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당시 나이가 64세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열다섯 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고 6·25 때 미군의 도움으로 한국을 지킨 아주 불리한 위치에 있는 약소국인(지금은 한국이 강대국으로 갑니다만) 당시에는 한국은 약소국이었습니다. 그 대통령이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미국의 대통령을 향해서 고얀 사람이라고 욕을 해가면서 회담도 깨면서 철저하게 국익을 지켰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북한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미국의 앞잡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김일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일성이 스탈린한테 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김일성이 스탈린한테 욕을 했으면 당장 암살되었을 것입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차이-그것이 바로 남한과 북한의 차이입니다. 북한 동포여러분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갑제 대표 : http://www.chogabj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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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인코리아 http://www.allinkorea.net/2008.3.26]

Posted by no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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