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기자는 1980년대에 재판과 수사에 대한 기사를 많이 썼다. 살인도 하지 않았는데 사형선고를 받아 억울하게 처형되었다고 판단하기에 이른 오휘웅씨를 다룬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검찰의 사건조작으로 한 무고한 인간이 스러져가는 과정을 다룬 ´김근하군 살해 사건 연구´(´신화 1900´이란 연극으로 각색되었다), 李穗根은 간첩이 아니라 정보부가 ´이중간첩´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한 기사(최근 과거사위원회는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판단을 했다) 등등이다. 이 글들은 사형제도 폐지론자들에 의하여 자주 인용되었다. 나도 한때 사형폐지론으로 기운 적이 있으나 지금은 존치론자이다. 1980년대 내가 썼던 글을 검색하다가 盧武鉉 변호사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을 보고 놀랐다. 1987년 5월호 월간조선에 쓴 ´판사들의 고민´에 나오는 한 대목을 소개한다. =========================================================== 영장 발부 종용 사건의 시말 지난(1987년) 2월7일 오후 2시.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인 김광일(金光一.49), 문재인(文在寅.36), 노무현(盧武鉉.42) 변호사 3명은 부산극장 앞에서, 고문으로 죽은 朴鍾哲군 노상 추도회를 열었다. 盧변호사는 종철군의 죽음에 대한 추도사로 가름하여 약 15분간 연설을 했다. 차츰 시위 군중이 부산극장 쪽으로 몰려 노상 추도회가 열기를 띠게 되자 드디어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군중을 몰아내고 변호사 3명과 在野 인사 4명 등을 경찰서로 붙들어갔다. 부산시경은 9일 오후에는 세 변호사와 4명의 재야 인사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검찰에 신청했다. 부산지검은 세 변호사중 盧武鉉 변호사 한 명만 구속시킬 방침을 세웠다. 최선호(崔瑄鎬) 부산지방 변호사회 회장과 조성래(趙誠來)총무가 이 소식을 듣고 진상 조사에 나섰다. 이들은 영장 당직 판사에게 찾아갔다. 이날 당직 판사는 부산지법 형사3단독 한기춘(韓基春)판사(36)였다. 검찰청법에 따르면 변호사를 구속시킬 때는 법무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만큼 부산지검은 모든 절차를 밟아 盧변호사에 대한 구속 영장을 부산지법에 청구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韓판사 방엔 구속영장을 받으려는 공안부 검사와 변호사회 간부들이 버티고 앉아 제나름대로 판사의 결심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盧변호사 부인도 韓판사 방에 나타났다. 드디어 오후 4시께 韓판사에게 영장이 왔다. 韓판사는 영장을 검토한 뒤 이날 오후 5시께 재야인사 金희로씨(51) 등 4명에 대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 영장을 발부하고 盧변호사에 대해서는 「직업이 변호사로서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시켜버렸다. 韓판사의 기각으로 난처해진 검찰은 가만 있지 않았다. 검찰 측은 이 날 영장이 으례히 떨어질 걸로 보고 상부에다 「영장이 떨어졌다」고 보고를 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검찰은 盧변호사에 대한 공소 사실을 한 건 더 추가하여 재청구했다. 추가된 내용은 부산에 민가협이 결성될 때 盧변호사가 경찰의 저지에 항의, 경찰과 몸싸움을 하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시위를 했다는 거였다. 부산지방법원 내규는 「한 번 기각된 영장을 재청구한 경우는 부장판사가 처리한다」고 되어 있다. 검찰은 다시 2월의 영장 담당 윤우정(尹羽正) 부장판사(44)에게 盧변호사에 대한 구속 영장을 재청구 했다. 이 때가 2월9일 오후 5시30분께였다. 검찰은 尹판사가 애초에 검사로 출발하였고 부산지검 1차장 검사 밑에서 시보를 했기 때문에 영장이 쉽게 떨어질 걸로 예상했던 모양이다. 이때 쯤 대한변협 유택형(柳宅馨) 인권위원장과 하경철(河炅喆) 변호사가 부산에 내려와 『변호사의 인신구속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협조를 정중히 요청하는 동시에 압력(?)도 넣었다는 소문이다. 오후 5시30분께 넘어온 영장 신청서를 쥐고 尹부장은 밤11시까지 검토하다가 기각도 안하고 발부도 안하고 서류를 책상 위에 둔 채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검찰은 또 당황했다. 검찰은 법원장에게 상의를 했으나 법원장은 부장판사들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검찰측을 돌려보냈다. 검찰은 영장을 들고 새벽1시께 수석부장판사를 찾아가 상의했다. 여기서도 별 효과가 없자 재청구 영장을 사인할 수 있는 홍일표(洪日杓) 부장판사(43)에게 가서 尹판사가 사라지고 없으니 직무대행을 하여 영장 사인을 좀 해 달라고 했다. 그때 시간은 10일 새벽 2시였다. 부산지법에서 재청구된 영장을 사인할 수 있는 법관은 두 사람이기 때문에 담당 尹부장판사가 사라졌으니 대신 형사3부 洪부장에게로 간 것이었다. 洪부장판사가 서명을 할 리 없었다. 결국 영장은 네 사람의 법관을 거쳐도 발부되지 않고 말았다. 韓판사는 지난 3월20일자로 형사단독에서 민사단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韓판사는 영장기각에 따른 불이익은 없었다고 기자에게 강조했다. 『그 당시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일부 판사들은 골치 아픈 영장이 자기에게 오지 않았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하던데… 사시 동기생인 盧변호사와 각별한 친분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글쎄요. 盧변호사와는 미 문화원 사건과 한미은행 난입사건 등으로 법정에서 자주 만났죠. 분명히 말하지만 영장은 동기생이다, 아니다, 어떤 변호사와 친하다는 차원을 넘어 법관의 양심에 따라 집행되어야 합니다. 盧변호사와는 1년에 한 번 정도 부닥칠까요. 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닙니다』 ========================================================== 당시는 全斗煥 정권 시절이다. 그때도 소신파 판사들이 있었던 것이다. 판사들의 독립적 판단에 대해서 정권측도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사법부의 독립성이 분명히 기능하고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판사를 했다고 해서 도맷금으로 욕을 하면 안된다. 한국에선 사법부의 독립성을 완전히 부정한 정권은 일찍이 없었다. 유신 때도 대부분의 판결에선 판사들이 독립적이었다. 인간사의 복잡성을 무시하고 한 마디로 한 인간과 한 시대를 난도질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위에 등장하는 金光一, 文在寅, 河炅喆, 趙誠來 변호사는 1987년 당시 노무현 변호사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 金光一씨는 그 뒤 국회의원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지금은 盧 전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이다. 文在寅씨는 盧 정권하에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비서실장을 지냈다. 河炅喆 변호사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장이고, 趙誠來 변호사는 열린당 의원을 지냈다. [독립신문 http://www.independent.co.kr/ 2008.8.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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