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1942년부터 김일성 北 지도자로 양성”

‘비록 : 평양의 소련군정’, 구소련 정치장교, 망명자 100여명 인터뷰·비밀해제문서 등 근거 밝혀

비록 : 평양의 소련군정
남·북 정부가 수립된 지 올해로 60주년이 됐지만 해방 전후를 둘러싼 남북 정치사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상당부분 베일에 싸여 있고 거짓주장이 진실을 일정 부분 대체하고 있다.

조선인민주의공화국을 ‘빨치산 영웅’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건립했으며 6·25전쟁이 ‘미제’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 대부분 북한의 주민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 나라에서 조차 이와 비슷한 수정주의 역사관이 진보학계와 학원가를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달 발간된 ‘비록(秘錄) : 평양의 소련군정’(한울)은 북한 근현대사의 귀중한 열쇠를 제공하며 그동안 잘못됐던 일부 주장과 역사적 인식을 바로잡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게 될 전망이다.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출신인 김국후 전 조선대 교수(62)가 쓴 이 책은 소련이 해체되던 1990년대 초 저자가 3년간 구 소련지역을 돌며 평양주둔 소련군 고위정치장교와 정부기관 간부, 망명한 북한의 고위인사 등 100여 명을 직접 만나 수집한 정보와 소련 국방성 고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낸 극비문서 등 생생한 1차 자료를 기반으로 쓰여졌다.
◇1945년 9월 30일 평양요정 ‘화방(花房)’에서 김일성(맨 오른쪽)과 조만식(맨 왼쪽)이 소련사령부 정치담당관(가운데)의 주선으로 처음 만나는 장면

저자는 우선 어떻게 불과 33세이던 소련군 대위 출신의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해방 이후 조만식, 박헌영 같은 쟁쟁한 지도자들을 제치고 북한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해답의 실마리는 저자가 제시한 1945년 8월 24일 소련 제2극동전선군 제88정찰여단장 저우바오중 대좌가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이었던 바실레프스키에게 보낸 긴급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다.

보고서는 김일성이 속해 있던 제88정찰여단이 해방 3년 전인 1942년 6월 스탈린의 직접 지시에 의해 창설됐으며 목적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빨치산 같은 해방 이후 조선의 정치, 군사 지도자 양성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소련은 1942년부터 극동지역 한반도에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동유럽에서처럼 소련공산당의 위성국가를 세우기 위해 군사ㆍ정치지도자를 양성했다”고 결론짓는다.

이때부터 김일성이 소련군 장교복장으로 원산으로 들어오는 1945년 9월까지는 스탈린이 향후 북한에 세워질 위성국가의 정치지도자로 김일성을 훈련시키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소련군 환영 군중대회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33세의 김일성. 소련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다. 그는 같은 해 9월 19일 소

보고서는 또 북한의 선전과는 달리 88정찰여단이 실제로 소련군의 대일전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보고서에는 “금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전체 여단 대원들은 일본 사무라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 나서라는 전투명령이 하달됐습니다. 그러나 대일전투작전이 개시된 지 4일 후 여단의 대일작전계획이 전면 취소됐고 현재까지 여단을 이용하지 않고 있습니다”(페이지58)라고 적혀 있다.

해방 직후 국민들이 볼 때 이미 잘 알려진 공산주의 리더 박헌영과 갑자기 나타난 소련군 대위 김일성 가운데 누구를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할까에 대한 소련 내부의 미묘한 분위기를 밝히는 대목도 흥미롭다.

소련 군사장교인 코바렌코의 증언에 따르면 박헌영은 1946년 5월 소련 KGB지국을 통해 스탈린에게 공산당은 남한에서 평화적으로 활동해 인민들을 끌여들여야 한다며 김일성의 무장혁명노선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KGB는 이를 계기로 김일성에게 노선을 시정하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군부와는 달리 정보기관 쪽에서는 김일성보다 박헌영에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론적으로 자신이 싫어하는 코민테른 활동전력이 없으며 소련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던 김일성을 선택했다.

이 밖에도 소련의 각종 대남 전략이 결정된 1948년 6월 제2차 남북지도자 연석회의 속기록을 통해서도 해방 이후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전략적 접근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대일전 참여로 한반도 반쪽을 점령한 붉은 군대 소련군이야말로 3년여 동안 북한에 주둔하면서 오늘의 북한정권을 창출해 낸 실질적인 주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평양의 소련군정’을 통해 밝혀진 내용과는 별개로 지난 25일 미국 워싱턴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스탈린이 미국의 6·25 참전을 유도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발표돼 주목된다.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는 이날 발표한 논문을 통해 1950년 8월 27일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 보낸 극비 전문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서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 보자. 유럽에서 사회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이는 스탈린이 미국의 개입을 우려해 애초에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반대했다는 통설과는 반대로 김일성의 남침을 적극 지원했다는 근거를 제공한다. 물론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이 같은 이유로 남침지원 방향으로 선회했을 가능성도 남아 있다.

김범수 기자bumsoo@futurekorea.co.kr

김필재 기자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200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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