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진짜 천재”

유영익 교수가 전한 '청년 이승만'



“이승만은 진짜 천재”

28일 문화일보홀에서 열린『조갑제의 현대사 강좌』초청강사로 나선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해 이같이 평했다. 이날 “이승만의 재평가”란 주제로 강연을 한 유 교수는,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청년 이승만’에 대해 장시간 이야기했다.



▲ 유영익 연세대 석좌교수. ⓒkonas.net

서당에서 1등만 했던 신동 이승만은, 갑오경장 이후 과거제가 폐지돼 벼슬길이 막히자 다른 진로를 찾게 된다. 그가 생각한 다른 ‘출세길’은 바로 영어를 배우는 것. 이에 이승만은 배재학당을 들어갔다. 이후 그의 ‘평생 모범’인 서재필을 만났고, 관리가 되려던 생각을 바꿔 ‘개혁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졸업후 이승만은 나라가 못사는 이유가 ‘전제군주제’에 있다고 보고, 일본과 영국같은 ‘입헌군주제’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고종을 폐위하고 박영효를 실권을 가진 총리대신으로 앉힌다는 내용의 쿠데타에 가담했다 발각,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당시 이승만의 이같은 생각은 곧 ‘역적모의’가 되는 것이다. 중죄인이 되어버린 이승만은 자신이 사형을 당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평소에 그를 좋게 보던 서양인 선교사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내는 등 도움을 주어 10년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러일전쟁으로 5년 8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신자가 된 이승만은, 성경반을 조직하고 영한사전을 쓰는가 하면 학교를 세워 간수들에게까지 글을 가르치는 등 감옥 안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같은 경우는 동서고금에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설득하는 재능이 뛰어난 그는, 감옥 안에서 40명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앞서 언급했듯, 이승만은 러일전쟁으로 보다 일찍 출소하게 되었다. 그가 석방된 것은 뛰어난 영어실력 덕분이었다. 그는 “한국사람중 가장 영어 잘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5년만에 미국의 명문대들(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을 거쳐 박사가 되었다. 이중 마지막 프린스턴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는 대학 측에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나는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2년만에 박사가 되어야 한다. 2년만에 박사학위를 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준다면 이 대학에 들어오겠다”

당돌한 동양청년의 말에 대학 측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사실 미국대학에서 2년만에 박사학위를 따는 경우는 미국인중에도 없다.

하지만 2년후 그는 정말로 박사학위를 땄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승만 박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잘 몰랐던 건국 대통령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전한 유 교수는, 李박사와 관련된 희귀한 자료들을 슬라이드를 통해 소개하기도 했다.



▲ 이승만 박사(우측 두번째)가 그의 첫째 부인(이 박사 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 ⓒkonas.net

이중에는 李박사가 그의 첫째부인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6·25전쟁 발발시까지 생존해 있었던 그녀는, 6·25때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유 박사는 전했다.(Konas.net)

김남균 코나스 객원기자(http://blog.chosun.com/hile3)

[코나스넷 http://www.konas.net/2008.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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