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월간지, '金大中=共産主義 활동가'

일본 월간지 『政界』,

金大中의 虛와 實- 파헤쳐진 “封印된 過去”

이주천 원광대 교수

일본 월간지 정계에 수록된 김대중 기사 : 金大中의 虛와 實- 파헤쳐진 “封印된 過去”

盧泰愚 全斗煥 전 대통령의 연이은 체포로 韓國政界는 風雲을 고하고 있다. 金永三 現 大通領은 바야흐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의 金” 金大中씨는 스스로 92年의 대통령 선거에서 前 大統領으로부터 秘蜜資金의 提供을 받았다고 是認하고 「金大統領도 選擧資金을 명백히 밝히라」고 金泳三씨와 對決姿勢를 분명히 했다. 이런 와중에 金大中씨의 “숨겨진 經歷”을 暴露하는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으로부터 날라왔다.

銃殺寸前 金鎭夏와의 運命的인 만남

韓國의 民主化 투쟁가로서 알려지고 또 野黨의 指導者로서 강력한 政治的 影響力을 갖고 있던 金大中씨는 1992년의 大通領 選擧에서 金泳三씨에게 패한 후 政界 隱退를 표명하고 많은 한국민으로부터 그 용기를 稱讚받고 國民의 박수 속에 일단은 정계에서 사라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金大中씨는 2年이 채 안되어서 國民과의 約束을 내팽개 치고 95年 여름 唐突하게 정계에 되돌아와 「新政治 國民會議」라는 新黨을 結成하고 스스로 總裁에 就任함으로써 이번에는 國民들로부터 反感을 사고 그 행위는 經蔑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金大中씨는 盧泰愚 전 대통령이 不正蓄財 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6억 5천만 달러 中에서 250만 달라를 받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新黨結成 후 政治生命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金大中씨가 政戒 은퇴를 번복하고 國民을 우롱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국민들 사이에서는 비판세력이 급증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金大中씨의 政治的 致命傷이 될 새로운 事實이 暴露되었다

金大中씨는 50年의 韓國戰爭時에 共産黨員이었던 事實과 그 當時 逮捕되어 美海軍艦艇에서 銃殺刑 直前 美軍情報部에 있던 金大中씨와 同鄕의 親舊의 助言으로 九死一生을 한 사실이 46年 만에 미국에서 알려진 것이다. 韓國戰爭은 50年 6月 25日(일요일) 아침 5時 北朝鮮 人民軍이 38度線을 突破하여 한국을 기습 侵攻함으로써 始作되었다. 同 人民軍은 侵攻 三日만에 首都 서울을 함락하였다.

韓國軍은 週末休暇中이어서 交戰體制에 들어가는데 時間이 걸렸고 破竹之勢로 進擊하는 人民軍에 밀려 後退하면서 體制를 整備하였다. 後退 中 경찰과 國軍 後退地域에 있던 共産黨員과 親共 또는 同調勢力이 同 地域에 남아 人民軍과 合決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共産黨員들을 逮捕 殺害하였던 바 그 수는 각지를 합하여 십수만명에 이른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서울에서의 戰鬪가 치열함에 따라 韓國政府와 美軍은 서울을 버리고 大田地方 以南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6月 27日 全羅南道 木浦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에 부산으로의 後退命令이 내려졌다. 木浦를 본부로 하여 近隣海域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과 海兵隊는 부산으로 後退 準備 中 本部의 지시에 따라 경찰이 逮捕한 木浦地域의 共産黨 勢力 약 450명을 海軍艦艇에 태우고 있었다. 艦艇에 실린 共産黨員과 그 지지자들은 부산으로 가는 途中 南海岸의 海上에서 총살하라는 命令이 내려져 있었다.

위 체포자 속에 金大中씨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이 銃殺刑直前의 金大中씨를 발견하여 목숨을 살린 사람은 金大中씨의 普通學敎 때부터 故鄕의 學友로 舊制 5年 科程의 商業學校까지 함께 공부하고 형제와 같이 지내던 金鎭夏라는 人物이었다. 이때 金大中씨는 金鎭夏씨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바다의 풀덩쿨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秘密이 韓國動亂 후 46年間이나 알려지지 않다가 只今에 와서 튀어나온 것은 건강을 해친 金鎭夏씨가 교회의 친한 牧師에게 信仰告白을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金鎭夏씨가 숨겨왔던 가슴속을 털어놓은 것은 美國와싱턴 D.C에서 韓國語로 發行되고 있는 週刊誌 「Washington Today」의 95年 8月 24日子 一面에 크게 報道되었다. 只今까지도 金大中씨의 政敵은 金大中씨가 靑年時節에 共産黨 活動家였다고 攻擊은 해오지만 戰中戰後의 混亂期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증거를 지적할 수 없어 소문의 영역에 머물렀다.

한편으로 金大中씨는 이것을 中傷이라고 否認하고 「戰爭詩 北朝鮮 人民軍에 逮捕되어 죽을뻔 했다고」 주장하고 逆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메카시즘 手法이라고 반격해왔다. 하지만 金大中씨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銃殺直前에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냈다는 새로운 사실이 明白해지고 현장에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당시의 자세한 經緯를 증언한 것이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이 證言 사실을 한국민이 알게 될 때 어떠한 반응을 할 것인가 큰 관심거리이다.

國民을 愚弄해온 金大中씨

「Washington Today」 砥는 1페이지 반에 거쳐 “金大中은 行動하는 野心家인가? 行動하는 良心家인가? ”過去의 經歷疑惑을 꼭 밝혀라“ 라는 表題로 K氏의 證言告白 記事를 크게 보도했다. 이 記事는 美國安保(ANSC) 韓半島 安保硏究所의 所長인 金映勳 博士의 著名이 들어간 特別記事이지만 證言者를 K氏 라고만 밝히고 그 K氏 와싱턴 近郊에 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K氏는 金大中씨가 共産主義 活動을 한 까닭에 美海軍艦艇上에서 銃殺刑의 위기에 있었음을 발견하고 美軍將校에게 자기의 친한 친구임을 保證하여 金大中씨의 목숨을 救하고 있다. K氏는 金大中씨와 동향으로 보통학교와 목포상업학교의 동창이며 당시 K氏는 미군정보기기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후 쭉 2,3년 전까지 金大中씨와는 서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고 한다.

K氏의 생생한 證言에 依하면 木浦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에 釜山後退 命令이 내려진 것은 韓國戰爭이 일어난지 이틀 후인 6月 27日 午前이었다. 그 때 共産主義者나 同調者 등 수백명이 경찰에 체포되어 美軍艦艇에 수용되었다. 그 중에 K氏는 金大中을 발견하고 자기가 갖고 있던 메달을 건네면서 「金大中의 이름이 呼名되더라도 絶對 對答을 하지마라 對答을 하게 되면 銃殺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후 美海軍 장교가 체포자 명부를 갖고 ?認點呼에 들어갔으나 金大中의 이름을 불러도 對答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將校는 이름이 呼名되지 않은 者는 앞으로 나오라고 指示하였으며 이때 金大中이 K氏는부터 받은 메달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왔다. 메달에는 美軍情報部所屬要員을 證明하는 K氏의 이름이 들어있었고 K氏는 그 將校에게 「이 사람은 나의 親舊로 情報蒐集을 위해 메달을 건네주었다. 이 사람은 金大中이 아니다.」 라고 가짜로 身分保證을 했기 때문에 金大中은 銃殺을 면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金大中씨는 「내가 젊었을 때는 民族主義 運動에 參加한 일은 있으나 共産主義 運動에는 참가한 일이 없다. 경찰을 돕기 위하여 民間海上警備隊를 조직하여 정부에 협력했다.」등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著書에도 이와 같은 것을 기술하고 있다. 金大中씨는 共産主義에 가담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韓國戰爭이 發生한 50年 6月 25日에는 事業關係로 서울에 있었는데 결국 피난은 가지 못하고 北朝鮮軍이 占領한 서울에 숨어있다가 數日 后 서울을 탈출하여 20일간을 걸어서 400킬로나 되는 木浦에 到着했다.」고 當時 自身의 狀況을 설명하고 잇다. 그러나 K氏 證言에 의하여 金大中씨의 지금까지의 주장을 虛僞로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이 白日下에 드러났다고 보도하고 있다.

證言者 K氏와 와싱턴에서 만나다.

者는 「Washington Today」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자 급거 와싱턴으로 비행하여 증언자 K氏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첫째 K氏의 證言을 記事化한 金映勳 博士를 만나 證言者 K氏의 所在地를 確認 K氏를 방문할 수가 있었다. 「Washington Today」紙에 報道된 記事의 뒷받침이 되는 證言者는 앞서 紹介한 金大中씨와는 옛 親友인 金鎭夏씨이다. 그는 70年代 後半에 美國으로 옮겨 美情報機關에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80년대 후반에 退職하여 현재는 딴 美國機關에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金鎭夏씨는 數時間에 걸친 取材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역사를 바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진실한 증언을 남겨야 할 것이 아니겠냐고 」간절히 요망한 결과 金鎭夏씨는 「Washington Today」紙에 실린 金映勳 博士의 記事內容에 대하여「확실히 틀림없다.」고 확인하면서 말문을 열고 자상하게 이야기 하였다. 또 金鎭夏氏는「金映勳 博士 以外에도 와싱턴에 사는 言論人 두사람에게 金大中氏에 관한 取材에 응한 바 있으므로 그 두사람을 만나보면 證言의 신빙성은 명확해질 것이며 金大中씨의 과거의 증언도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두사람의 저널리스트를 만나보기를 勸했다.

물론 필자는 그 中 한사람을 만나서 金鎭夏氏의 證言과 「Washington Today」의 記事內容에 아무런 차이점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金鎭夏씨는 金大中씨와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證言하였다.

金大中氏의 출생지는 한반도의 서해안 最南端 全羅南道 新安郡 荷衣面 後光里이다. 荷衣面은 인구 1만 5천명이 사는 荷衣島라작은 섬이다. 그 荷衣島에서 24年 1月섬6日에 출생한 金大中은 33年 4月 1日 荷衣島에 처음으로 新設된 荷衣普通學校 2學年에 입학했다.

한편 金鎭夏氏의 출생지는 同 荷衣面의 安佐里이다. 安佐里도 荷衣島라는 섬으로서 人口 천명도 안되는 작은 섬이다. 荷衣島와 安佐里의 거리는 500m 정도로 큰소리로 부르면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이 두사람은 5학년(1937년)때의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本土의 木浦 第一 普通學校에 轉學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두 金氏가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普通學校를 졸업한 두 사람은 名門의 木浦商業學校에 進學, 43年 3月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金鎭夏氏는 滿洲의 建國 大學校에 籍을 두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早稻田 大學에 編入하였고 金大中氏는 木浦에 있던 日本人 海運 會社에 지원했다. 45年 8月 日本의 敗戰으로 韓國은 獨立했고 金鎭夏氏는 와세다를 졸업 한국의 進駐한 미군政膚의 通譯官으로 채용했다.

獨立된 한국에는 많은 政黨이 생겼는데 그중에서 제일 먼저 탄생된 정당은 民族主義者인 呂運亨이 주도하는 建國 準備 委員會로서 同年 8月 17日에 發足하였다. 金大中은 同月 26日 同會 全南 支部에 入會하여 木浦市支部靑年 同盟宣傳 部長으로 任命되어 政治活動을 시작하였다. 當時 韓國의 政治狀況은 極히 混亂한 상태였고, 美軍政은 同年 9月 建國準備委員會를 左翼으로 단정하고 解散을 命했기 때문에 同會 그리고 靑年同盟도 해산 되었다.

金大中氏은 46年 3月 木浦에서 結成된 新民黨에 參加하여 組織部長이 되었다. 同時에 北朝鮮의 支授로 創設된 南勞黨 行動前部隊인 民主靑年同盟 木浦支部 副委員長을 맡아 活動했다. 金大中氏은 47年 6月 木浦市內에 있는 大成 南嬌 西嬌 警察 派出所 放火事件의 主犯으로 警察에 拘俗되었다. 이때부터 金大中氏은 美軍政廳과 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추적 당했다. 金大中은 48年 여름에도 全南 寶城 警察署 放火事件에 關與되어 쫓기는 몸이 되었다.

韓國 政府가 수립된 后 韓國內의 共産黨 소탕작전이 전개 되면서 共産黨에 가담한 자나 支持者들을 管理하는 保導聯盟이라는 조직이 생겼다. 한국정부와 미군정보 기관은 保導 聯盟이 관리하고 있던 자들을 特別管理 下에 두었으나 한국전쟁 발발시 北朝鮮軍의 공세에 밀려 후퇴하는 途中에 그 관리 하에 있던 자들을 逮捕하여 수만명을 총살했다. 그 中에 한사람이 金大中으로 그 위기를 앞에 말한 바와 같이 金鎭夏氏가 구하였던 것이다.

金大中은 어떻게 책임을 질 작정인가?

當時 서울 美軍情報機關의 근무하고 있던 金鎭夏氏는 左翼勢力의 활동이 활발해진 全羅南道의 파견되어 木浦地區에 주둔하고 있던 美海軍部隊에 배속되었다. 金鎭夏氏는 그곳에서 조사과정을 통하여 金大中氏가 左翼活動家로써 쫓기고 있다는 事實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金鎭夏氏는 木浦의 有力者이기도 한 金大中氏의 당시의 妻 車容愛의 아버지인 車寶輪씨를 만나 金大中氏가 左翼運動에서 손을 떼도록 설득해 본적도 있다.

이때 마침 金大中氏가 共産主義者 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49年 2月 20日 金大中氏가 태어난 고향 근처의 新安郡 荏子面 出身의 北朝鮮 스파이며 南勞黨 民族戰線 副委員長인 兪在埴이 체포되었다 그가 털어놓은 바에 依하여 北朝鮮 往來때마다 金大中氏로부터 活動資金이 提?되었던 사실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金大中氏는 光州의 全南警察局에 체포되었다.

이때에도 丈人 車寶輪氏가 相當한 로비資金을 사용하는 한편 金鎭夏氏는 목포地區 韓國海軍隊長이던 朴城哲氏에게 金大中氏의 보석 협력을 의뢰하는 동시 미해군 대장에게 설득해줄것을 간청했다. 그러한 보람이 있어 金大中氏는 朴城哲氏의 身元保證을 얻어서 保釋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했던 金大中氏는 韓國戰爭 休戰 后 政治家로 變身하여 어떤 뜻에서는 金鎭夏氏의 은혜를 갚게 되었다.

60年 4月 「4.19學生 革命」이 성공하여 民主黨이 탄생했다. 金大中氏는 生命의 恩人으로써 어떤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金鎭夏氏를 찾아 내어 金大中氏의 정치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張勉 總理에게 부탁하여 金鎭夏氏 를 外務部에 課長으로 起用했다. 그 后 金鎭夏氏는 외무부 아시아 담당 副局張까지 승진했는데 61年 5月의 「5.16軍事 英命」으로 民主黨 政權이 무너지는 바람에 政界를 떠난 뒤 일본에서 직업을 얻었으나 미국으로 건너가 永住했다. 金鎭夏氏가 金大中氏의 생명을 구한 기록은 일본을 거점으로 한 맥아더 司令部에 소속된 情報部隊의 기록에도 남아 있다.

또 月刊砥 「中央公論」의 80年 7月 호에 시바다 미노로(故人)씨가 「光州市 X란의 背景의 사람들」이란 제하에 기사속에 GHQ 의 정보를 인용하여 「金大中氏는 木浦地區의 海軍憲兵隊에 自首 직후 保導聯盟에 檢擧 拘俗되었다. 그 때 美軍 CIC의 記錄에 依하면 徹收時 射殺 對象者로 指名되어 있으나 목숨을 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事實에 대하여 金大中氏도 일부는 인정하고 있지만 이번 金鎭夏氏의 證言에서도 새로 명백해진 사실이 많다. 金大中氏는 韓國國民에 대하여 거짓말을 해온 것을 자뭇 事實인거 같이 주장해 왔다. 金鎭夏氏가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銃殺 直前에 救出된 事實등을 어둠속에 영원히 묻어둘 생각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金鎭夏氏의 金大中氏 救出에 관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한사람으로 현재 일본이나 미국 및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孫忠武氏가 있다. 孫氏는 서울에서 發行되는 京鄕新聞의 特派員으로 東京에서 生活을 한 경험도 있는 人物로서 그와 金大中氏와의 關係는 67年 6月의 韓國 總選擧때부터 約 30年間이나 밀접한 人間關係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孫氏는 別途로 金大中氏에 관한 微功開 事實을 많이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只今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韓國에 있어서 金鎭夏氏의 證言內容이 널리 報道 되었을 때
言論界에 연줄이 많은 孫氏가 어떠한 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궁금하다

只今 한국에서는 60年 5月에 일어난 全斗煥 盧泰愚 두 前職 대통령에 대하여 特別法을 制定하고 또 책임을 追求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金大中氏는 支持者를 속여 피해를 입힌 책임에 대하여 問責을 당하게 될 盧泰愚 前 大統領으로부터 不正한 政治資金을 받는 등 스스로의 經歷으로 국민들을 몰아 붙인 責任을 어떻게 질 것인가? 國民들의 同氏에 대한 관심은 말년의 대통령 선거와는 別途로 高調되기만 할 뿐이다.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교수/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jucheon@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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