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장학회에 얽힌 노무현-박근혜 '악연'

삼복 더위보다 뜨거운 정치권의 ''정체성'' 공방이 지난주 내내 계속됐다. 이 공방의 한 소재가 정수장학회 문제. 여당에선 정수장학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산물인 ''장물 장학회’라며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국고로 반환할 것을 촉구하고, 이에 대해 야당은 “잘못된 것이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노무현 대통령이 정수 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아온 사연이 소개되고, 특히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故 김지태씨가 ‘친일’로 큰 돈을 모았다는 풍문이 인터넷상에 나돌면서 논란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정수장학회 ‘장물’ 논란▽
27일 열린우리당 김현미 대변인은 “박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정수장학회는 5.16 당시 부산지역 기업인 고(故) 김지태 선생의 재산을 빼앗아 만든 것이기에 우리는 ‘장물장학회’로 부른다”고 한나라당을 향해 포문을 열했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조성래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정수장학회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놓은 상태다.

박정희 대통령의 ‘정’자와 육영수 여사의 ‘수’를 따서 이름 지었다는 ‘정수장학회’의 설립일은 1982년 1월 14일.

현재 박 대표는 1995년부터 부산일보 지분 100%와 문화방송 지분 30%(70%는 방송문화진흥회 소유), 경향신문사의 서울 중구 정동 대지 723여평을 갖고 있는 이 장학회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지난 1962년 7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설립한 재단법인 ‘5.16 장학회’가 모태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1981년 이름만 정수장학회로 바뀌었다.

열린우리당이 공격하는 것은 바로 ‘5.16 장학회’ 설립 당시의 문제.

기업인 김지태씨는 1962년 군사정권에 의해 재산 해외도피 혐의로 구속된 뒤, 부일장학회를 비롯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 서면 일대의 토지 10만평을 국가에 양도했고, 이를 5.16 장학회가 편입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박 전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사유재산을 무단 강탈한 것”이라며 국고 반환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는 “장학회 설립과 운영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며 반환요구를 일축하고 있는 상황.

박 대표는 “자진 헌납이 된 것이고, 좋은 일에 쓰도록 된 것”이라며 “그게 문제가 된다면 정권이 몇 번 바뀌었는데 벌써 문제가 되지 않았겠나. 하자가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속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또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개인 재산도 아니다”라며 “이사장으로 잘못한 것도 없고 장학회도 모범적으로 운영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이사장직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盧 “나의 키다리 아저씨, 故 김지태 선생”▽
한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故 김지태씨는 조선견직한국생사, 삼화고무, 삼화그룹 창업자로 훗날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또 1948년에는 부산일보사, 1958년에는 부산문화방송 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제2대 민의원선거 때 부산갑구 무소속으로, 196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는 자유당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정수장학회(5.16 장학회)의 전신인 부일 장학회는 故 김지태씨가 당시 부산 땅 10만평과 돈 3천만환을 자본으로 1958년 11월에 설립했다.

이 장학회는 공부는 잘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입학금과 매달 일정액의 학비를 지원했다.

공납금이 없어 진영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 중이던 소년 노무현 역시 이 장학금의 혜택을 받아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부산상고 시절에도 3년 내내 동문 김지태씨가 만든 ‘백양장학금’을 받았던 노 대통령에게 있어 김씨는 ‘평생의 은인’인 셈.

고교 졸업 후 사법고시에 합격한 노 대통령은 김씨가 경영했던 삼화고무의 고문 변호사를 맡게 된다. 1982년 김씨 사망 후에는 그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00억원대 소송의 변호를 맡아 승소, 훗날 대통령이 법조계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런 인연으로 노 대통령은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부일장학회는 김지태 선생이 만든 한국 최초의 장학재단이었는데, 박정희 정권이 그것을 빼앗아서 지금은 정수장학재단으로 남아 있으니 부당하고 기막힌 일이다”고 밝힌 적도 있다.

▽부일 장학회와 김지태, 그리고 박정희▽
생전 기업인으로서만 아니라 언론인, 정치인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인 故 김지태씨.

그런 그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악연(惡緣)을 맺은 것은 1962년 4월의 일이었다.

사업차 일본에 갔다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로 끌려간 김씨는 이내 재산 해외도피로 구속됐고, 아내 송혜영씨 역시 관세법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사면의 조건은 부일장학회의 운영권,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의 지분 포기.

김씨의 큰아들 김영구 전 조선견직 회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아버지가 끌려간 후 내가 인감도장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갖고 오라는 전갈이 와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로 갔다”며 “포기 각서는 이미 작성된 상태였고, 아버지는 수갑을 찬 채로 도장만 찍었다”고 증언했다.

강압에 못이겨 재산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김씨는 각서를 쓴 이틀 뒤 풀러났고 부일장학회는 5일뒤에 5.16장학회로 바뀌었다.

김영구씨 등 유족들은 군사정권에 재산을 빼앗긴 이유에 대해 “박 전 대통령이 5.16을 일으키기 전에 요청했던 거사자금 5백만환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김지태씨는 친일 기업인이었나?▽
이런 가운데 군사정권이 정수장학회를 빼앗은 것은 ‘친일청산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글에 따르면 “정수장학회 전신인 부일장학회 설립자 故김지태씨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친일행위를 했다”는 것.

이 때문에 “부일장학금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친일 청산을 부르짖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해당 글은 “김씨는 지난 1932년 일제시대 대표적인 식민지 착취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울산에 있는 2만평의 금싸라기 땅을 불하받았다”며 “10년 분할 상환의 조건으로 불하받은 이 토지는 그의 사업 밑천이 되었다”고 주장했다또 “울산 농장을 바탕으로 1934년에는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해 산업자본가로 변신, 계속 재산을 모아 해방 이후에도 거대 재산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김영구씨는 “아버지에 대해 구구절절 해명하지 않겠다. 대신 이 것을 읽어달라”며 책 한 권을 내 주었다. 바로 ‘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석필刊)는 제목의 김지태 평전이다.

이 책에 따르면 김씨는 1927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이 학교 후쿠시 교장의 추천에 의해 ‘동양척식회사’ 에 입사했다. 그는 비록 일본회사에 취직했지만 개인적으로 정묘 야학교 설립, 신간회, 조선청년동맹 등 여러 가지 애국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문제의 동양척식회사 땅 불하는 1932년 그가 폐결핵에 걸려 회사를 그만 뒀을때 일어났다.

책에 따르면, 일본인 지점장이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울산 전답 2만평을 10년 상환 조건으로 불하 받게 도와주었다는 것.

그간 성실한 근무와 창의력을 높이 산 지점장이 시골로 요양하러 떠나는 김지태씨를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동양척식회사 소유 토지 불하를 본사에 요청, 이런 특혜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동척이 소유했던 토지가 9만여 정보에 이르러도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불하한 땅은 고작 11%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김지태 친일 논란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정권의 공과와 친일 청산까지, 현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제기되는 모든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수장학회 논란’.
과연 이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끝을 맺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최현정 동아닷컴기자 phoebe@donga.com
[동아일보 200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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